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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싶은 일과 해야하는 일의 사이

중고_사회초년생

어릴 적 나의 20살은 참 길게 느껴졌다. 일 년이 버티기 벅찼고, 하루하루가 고됬으며, 어른이 되기 위한 길은 멀고도 험해보였다. 그런데 덜컥, 나는 이제 그 멀어보였던 경력직이 되었다. 나름 산전수전 다 겪고 알차게 들어찬 커리어였다고 자위하지만 정작 내세울 것은 없었다. 거듭되는 실패의 연속이었다. 물경력은 아니라고 말하고 싶지만 그걸 증명할 만한 가십거리 하나 없었다. 호기롭게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곧바로 서울로 올라가 일을 시작했던 겁없던 시절의 나는 이제 겨우 어른의 영역에 발가락을 들이미는 중고 사회초년생이 되었다.

기가 드세고 고집불통에 어릴 적부터 자체 조기교육으로 디자인만을 쫓았던 나는 쉽게 어른들의 사회에 적응하지 못했다. 디자인은 내가 제일 잘하는 것이며, 내가 좋아하는 것이었고, 즐겨하는 놀이였다. 고등학생 시절, 팀원과의 불화로 피를 보고 말았던 날. 동아리 담당 선생님은 나를 응급실로 데려다주며 말했다.

ㅡ 윤아.

ㅡ 네.

ㅡ 좋아하는 것이 일이 되면, 그때도 좋아하게 될까?

ㅡ ···

선생님, 그 학생은 이제 이렇게 커서 선생님의 결혼 소식을 듣습니다. 여전히 디자인을 좋아하고요. 하지만 일은 일대로 싫습니다. 내 일이 좋아하는 일이 아니라 싫어하는 일이 될 때면 이따금씩 손이 멈춥니다. 나 자신을 포함해 모든 것에 화가 나고, 생각에 염증이 돋습니다.

· · ·

그래도 나는 그러면 안되지 않을까.

하기 싫어도 일은 일이다. 아직은 더 놀고 싶은 철없는 아이가 들어찼지만 부족한 집안 살림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야하는 부담감이 생겼고, 나와 같은 시기에 시작해서 서울숲 트리마제에 입성한 그들에 대해 품는 열등감으로라도 돈을 벌어야 한다. 성공해서 증명해야 한다. 슬슬 돈맛을 보고 나아지는 삶을 보자면 과거의 내가 무색하게도 싫어하는 일을 억지로 하는 내가 보인다. 하고 싶은 것만 하려고 남들보다 일찍 사회의 텁텁한 공기를 마셨지만 정작 나는 하고 싶은 것도 지키지 못했고, 영앤리치의 꿈도 이루지 못했다.

기쎄고, 고집불통, 독불장군, 유아독존이었던 철부지에서 공사구분에 능한 똑부러진 사회인이 되어야 했다. 하기 싫은 일을 하고 나면 다시 좋아하는 일이 보상으로 날라올 것이다. 적절한 사회인은 그런 식으로 적당히 당근에, 이따금 설탕도 뿌려가면서 싫어하는 일을 하게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도······. 나는 그러면 안되지 않을까?

아물지 않는 생채기에 굳은살까지 떼어내 다시 생채기를 만드는 삶을 들쳐엎고 살아왔다. 무엇을 지키기 위한 삶이었을까. 고작 몇 년의 지난 유년기이자 사소한 헤프닝들이었을지도 모르지만 내 욕심, 아니 욕망···, 아니, 꿈을 지키기 위해 짊어진 삶이었다. 지난 삶에 대한 보상이 겨우 이거였을까. 아니면 앞으로의 꿈을 지키기 위해 지금 또 다시 이 삶을 짊어지는걸까?

나는 다시 삶의 갈림길에 섰다. 서울에서 사업을 시작한, 지금은 서울숲 트리마제에 입성한 형님을 따라 고등학교를 중퇴했던 그 날처럼, 어김없이 나는 선택해야 한다. 무엇을 택하든, 후회없는 삶을 살길.


Snax's comments

오랜만에 포스팅입니다. 하도 집 밖을 안나가다 보니 문학에 관심이 생겨서 마음에 드는 작가분의 소설과 에세이를 모조리 사와서 읽고 있습니다. 어릴 적부터 글읽기는 싫어했어도 글쓰기는 좋아했는데 가볍게라도 문학을 접하다보니 문득 내가 써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최근 다시 일을 시작하면서 여유로워진 삶과 친구들과 나누던 "벌써 우리가 2n살이라니"라는 감정을 담아 소설겸, 수필ㅡ 에세이? 따위를 써봤습니다. 비슷한 감정을 느끼는 분들이 제 또래에 많을거라 생각합니다. 그런 분들에게 공감성 위로라도 줄 수 있었으면 좋겠네요. 이번 2021년 한해는 좀 더 나은 해였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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